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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의거를 기억해주세요! 대한민국 최초 민주운동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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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0-03-15 23:35:38 조회수 196

곧 3월 15일이 다가옵니다.

3월 15일은 아주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날로, 꼭 기억해야 하는 사건이 있었는데요. 바로 3·15 의거입니다. 학생과 시민들이 함께 목소리를 낸 특별한 날이라고 할 수 있었던 3.15의거에 대해 함께 알아볼까요?

3·15 의거는?

출처:국립 3·15민주묘지

3·15 의거는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3․15 부정 선거에 반발하여 경상남도 마산에서 일어난 대규모 시위입니다.

이승만 자유당 정부는 1960년 3월 15일 치러진 정·부통령 선거의 장기집권을 위해 선거 준비 과정부터 노골적인 부정행위를 저질렀습니다. 이에 선거 준비 과정 중인 2월 28일, 대구에서는 학생들의 첫 시위(2·28 시위)가 발생하게 됩니다. 당시 대구에서는 민주당 유세날에 학생들이 유세에 참가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일요일에도 고등학생들을 등교시켰습니다. 이에 반발한 학생들은 정부의 불법적 선거 개입을 비판하는 시위를 일으키게 됩니다.

3·15 의거,

왜 일어나게 되었을까?

자유당 정권은 사전 투표, 3인조·9인조 공개투표, 투표함 바꿔치기 등 다양한 부정행위를 저질렀는데요. 이러한 부정 행위의 결과로 개표 과정에서 부통령 이기붕의 표가 100%에 육박하는 결과가 나와 이를 79%로 하향 조정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죠. 결과적으로 자유당 후보의 득표율이 95~99%에 이르렀지만 하향조정하여 이승만 963만 표(85%), 이기붕 833만 표(73%)로 이승만·이기붕 후보가 각각 정·부통령에 당선되었음을 공고합니다.

공공연한 부정행위가 목격되자 마산 시민들은 '협잡선거 물리쳐라'는 구호를 외치며 항의하기 시작했습니다.

독재 정권에 맞선 시민들의 투쟁,

3·15 의거 당일

3월 15일 자유당 정권의 투표 부정에 반발한 학생과 시민들이 시위에 나서자 경찰은 최루탄과 총기를 이용해 무차별 발포를 가했고, 결국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정부는 이 시위를 공산당이 배후에서 조종한 좌익 폭동이라고 발표, 마산 시민들의 반발을 고조시키기에 이릅니다.

출처: 경남교육청 김주열 열사 사진자료

이 후 4월 11일, 28일 동안 실종되었던 마산용마고등학교(당시 마산상고) 김주열 학생의 시체가 마산 중앙 부두에서 떠오르게 됩니다.

「김주열 열사」 기록물은 최루탄이 눈에 박힌 사진과 시신이 부두에 인양된 상황이 보이는 사진 자료로, 1960년 4월 11일 열사의 시신이 발견된 날 당시 찍은 것입니다. 이에 분노한 마산 시민의 2차 시위가 발발하게 되었습니다.

마산시민과 학생들의 투쟁에 대한 경찰당국의 가혹한 탄압은 전 국민들로 하여금 슬픔과 분노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리하여 이는 곧 ‘부정선거 다시 하라. 구속된 마산 학생 석방하라’는 구호와 함께 4․19혁명으로 이어졌고,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함으로써 민권이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자유, 민주, 정의가 기본 정신인 3·15의거는 현대사에 있어서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 발전에 큰 영향을 준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출처:국립 3·15민주묘지

국립 3·15민주묘지

위치 : 경남 창원시 마산회원구 3·15성역로 75

문의 : 055-253-9315

1968년 마산시 구암동 애기봉에 1,200평 크기의 묘역을 만들고 사건이 발생한 지 9년이 지난 1969년 1월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3·15의거 희생자 묘 13기를 이장하면서 묘지가 조성되었습니다. 1998년 3월부터 3·15성역공원 조성공사가 시작 후 2003년 3월 15일 준공식이 열렸습니다.

준공에 앞서 2002년 8월 1일 대통령령 제17668호에 따라 3·15성역공원이 국립3·15묘지로 승격되었습니다. 국립묘지 설치, 운영에 관한 법률에 따라 2006년 1월 30일부터 국립3·15민주묘지로 이름이 바뀌었죠. 모두 4개 묘역에 80위를 안장할 수 있도록 조성되었으며, 2006년 5월 현재 26위가 안장되어 있습니다. 안장대상은 3·15의거 때 사망한 분들과 3·15의거 때 부상당한 뒤 사망한 분들, 3·15의거 유공건국포장 수상자로서 사망한 분들입니다.

묘역은 쉬는 날 없이 매일 개방되지만 기념관의 경우 매주 월요일 휴관합니다. 기념관 영상실에서는 3·15의거의 배경과 과정, 의미 등을 알리는 다큐멘터리와 애니메이션을 상영하고 있으니 그날을 기억하기 위해 코로나바이러스가 사라진 이후 3·15국립묘지를 방문해보시기 바랍니다.

현재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 방지를 위하여 나라사랑 영상관 운영은 중지하고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3·15의거와

참정권 회복

3·15의거는 부정행위를 하는 정부에 대항해 국민이 나서 인권과 주권을 회복한 우리나라 최초의 사건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국민의 힘으로 정치 권력을 변화시킬 수 있으며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주권재민’ 원칙을 다시금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죠.

국민의 참정권과 선거의 4원칙인 보통선거, 비밀선거, 직접선거, 평등선거는 어떤 정부도 훼손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민주주의나 인권 발전은 수많은 시민들의 참여와 노력, 투쟁과 희생을 통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3·15의거를 통해 제대로 배울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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